1794년 12월 사흘 동안 모든 교파의 기독교인들이 총회를 열었고, 이 총회는 런던 선교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그 협회는 남해 제도에 그들의 비전을 세웠다. 거리도 바다도 모르고 '더프'라는 배를 구입했다. 그들은 개종한 선원, 윌슨 선장을 고용하고 6명의 여성과 2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20명의 선교사들로 구성된 밴드를 모았다. 21개월간의 준비 끝에 '더프'는 1796년 9월 23일 포츠머스에서 출항했다. 약 2만 마일의 항해인 7개월간의 항해 끝에 이 최초의 선교선은 타히티에 도착하여, 우호적인 원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첫 번째 선교단을 무사히 인도했다.
트리이튼 호 (1839 – 1846)
19세기 중반의 선교 성공으로 인해 호주, 뉴질랜드, 남태평양 섬 전체에 많은 웨슬리 교회가 설립되었고, 따라서 전용 선교선이 건설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트라이튼'은 최초의 감리교/웨슬리언 선교회의 첫 대양 항해 '높이 배'이다. 이 두 살짜리 브리지는 '세기 자금'으로 경매에서 매입되어 1839년에 재매입되어 출시되었다. 선장과 승무원(웨슬리안이 틀림없음)의 보험, 정비, 선정을 감독하는 런던에 본부를 둔 "선박위원회"가 관리했다. 그 배는 선교사, 선교사, 그 가족, 선생님, 책, 도서관 인쇄기,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1839년 9월 14일 토요일 트리톤호는 두 개의 깃발을 들고 브리스톨에서 항해했다. 하나는 유니온 잭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선언했다. 1840년 5월 7일, '트리톤'은 7개월 4일간의 해양 항해를 마치고 뉴어크 미션역 외곽의 호키앙가 강에 정박했다. 그녀는 노련한 감리교 선교사들이 몇 달째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뉴질랜드로 모든 손, 승무원, 승객들을 무사히 데려왔었다. 매년 그녀는 뉴질랜드에서 천 마일의 여정인 피지 미션 스테이션을 위해 충분한 물자를 운반하곤 했다. 객실이 있을 때, 상업용 승객들과 화물도 운반할 수 있었다. 갑판에는 승객들이 갑판 위에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 살아있는 닭, 칠면조, 돼지들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1841년 5월, 더 크고 빠른 배가 필요함에 따라 '트라이튼'이 호주 선교 위원회에 넘겨졌다. 트리톤호는 900파운드에 팔렸고 수익금은 새 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존 웨슬리'는 남태평양의 산호초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쌍둥이 돛대와 이중의 선체에 장착되었다. 그녀는 길이 90피트, 너비 25피트였고 1846년 11월 7일 런던에 등록했다. 그녀는 즉시 선장 조지 벅의 지휘 아래 14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사우샘프턴에서 호주와 뉴질랜드로 항해했다. 그 배는 1847년 3월 18일에 기록적인 시간에 시드니에 도착했다. 그녀는 19년 동안 남해의 감리교 미션을 섬겼는데, 그 기간 동안 그녀는 1850년에 단 한 번 수리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고 코코넛 오일을 운반할 수 있는 철제 탱크를 장착했다. 그 배는, 섬에서 깡충깡충 뛰는 동안, 수확한 석유를 시장에 가져와서,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섬 사람들을 도왔다. 선교 감독관인 월터 로리는 그 여행에 그녀와 함께 영국으로 항해했고 그가 1851년 5월 엑세터 홀에서 열리는 웨슬리 선교회의 연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 시간에 도착했다. 그는 선교 자금을 돕기 위해 400파운드에 팔린 여러 가지 토산품을 가지고 돌아왔다(아래 이미지 참조).
1865년 11월, '존 웨슬리'는 남태평양에서 껑충껑충 뛰던 섬이었는데, 폭풍을 맞아 바다 표면의 강한 파도가 그녀를 통안 암초에 던졌고, 그 후 그녀의 켈은 두 번의 지진으로 부서졌다. 모든 선교사들과 선원들은 무사히 뭍에 올랐다. 물이 가라앉으면서 그들은 대부분의 소지품을 인양할 수 있었다. 식인종 중에서 '조지왕'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는, 그때쯤 개종하여, 승객들과 화물을 긴장된 배에서 구출하는 것을 도왔다. 거주 장인들은 그녀의 목재들로 가구를 만들었고 그녀의 선체는 48파운드에 팔렸다.
아래는 우리 박물관에 있는 존 웨슬리의 모형을 찍은 사진이다.
존 웨슬리 2세(1866-1881)
잃어버린 배를 대체하기 위해, 존 웨슬리 2호는 1866년에 길이가 117피트인 3개의 돛대를 가지고 3,400파운드의 비용으로 임관되었다. 그녀는 1867년에 호주에 도착했고 14년 동안 점점 더 많은 미션 스테이션을 수행했다.
1880년 11월 15일 '존 웨슬리 2세'는 피지를 떠나 뉴브리튼으로 향했다. 항해 중에 그녀는 매우 격렬한 폭풍우를 만났다. 갑판이 물에 잠겼기 때문에 돛대에 올라 상투를 내려올 수가 없었다. 화물은 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배가 기울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거센 바다에서 극히 위험한 작업인 돛대 세 개를 모두 잘라내기로 결정되었다. 최고 책임자인 랭커스터 씨는 배 밖으로 내던져졌고, 또 다른 파도가 그를 뒤로 휩쓸었을 때 배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고, 그는 간신히 배에 머물게 하는 밧줄에 매달렸다. 그리고 나서 승객들은 배를 바로잡기 위해 화물의 일부를 다른 쪽으로 옮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단 폭풍이 가라앉자 예비 탑마스트가 메인 마스트의 그루터기에 매여졌다. 만셀 선장은 그 후 성(聖)에 있는 선교역까지 항해하는 대신 산호해를 건너 1700마일 더 떨어진 호주로 가는 항로를 정하기로 했다. 약 90마일 떨어진 솔로몬 제도의 크리스토발. 그렇게만 했다면 배를 다시 매설하고 선교사에게 긴급한 식량과 약품을 공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셀 선장의 경솔한 행동이 당국에 보고되었다. 그 배는 결국 1881년 1월 23일에 시드니에 도착했다.
시드니에서는 '존 웨슬리 2세'가 완전히 수리되고 다시 설치되었다. 그 후 그녀는 상업용으로 판매되었는데, 엔진 동력선이 미션들의 작업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본래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과학 박물관은 그 배의 모형을 가지고 있다.
Claudia Vagg에 의해 쓰여졌다.
https://museumofmethodism.wordpress.com/2016/11/10/the-ships-of-methodist-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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